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 사후(死後)의 삶속으로 ...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 사후(死後)의 삶속으로...
1. 역대 왕들의 사후세계의 삶의 질은, 후대 왕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요즘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대가족을 거느린 군주다. 두 분의 왕후와 한 분의 후궁한테서 총 8남 5녀를 두었다. 두 아들이 왕통을 계승했다. 이 정도면 부러울게 없을상 싶은데 내면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비극적이다. 태조는 사후 그의 5번째 아들 이방원(태종)의 효심에 의해서 양주 검암, 지금의 구리 동구릉, 건원릉에 묻혔다. 최고의 명당이고 태조가 생전에 자리를 잡아둔 곳 중에 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의 창업주로서 손색없는 최고의 명당지에 당당히 묻혀서 후세 왕들의 배알을 받으며 조선왕조를 죽어서도 호령하는 듯하다.
2. 태종은 아버지가 고향 영흥을 그리워하는 것을 알고 봉분에 사용할 흙과 억새풀을 함흥 영흥에서 옮겨와 봉분에 심었다.
이는 가히 효심의 극치다. 태조는 아들 방원의 덕에 고향의 향수를 맡으며 한양의 근교에 묻힌 것이다. 아! 얼마나 행복한 사후의 삶인가... 그른데도 태조는 그 영광의 뒤에 쓸쓸한 사후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연유는 무엇인가? 〔조선의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사후의 삶 속으로 들어가다〕라는 주제로 여행을 떠나보자
3. 태조한테는 향처인 신의왕후 한 씨와 경처인 신덕왕후 강(康)씨가 있었다.
신의왕후 한 씨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1년 전에 돌아가셨다. 신의 왕후 한 씨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 중에 2대 왕 경종과 3대 왕 태종을 두었으며 무엇보다도 남편이 조선의 왕이 되었으니 그녀의 덕은 천하보다 크다 할 것이다. 신의왕후 한 씨의 삶은 고향을 지키고 아이들을 돌보며 또 때로는 남편을 따라 군인 가족의 삶을 잠시 보내기도 했었다. 어쩌면 잠시 동안이었지만 한 씨 부인이 남편과 보낸 군인가족의 삶이 가장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아들 방원(태종)의 덕분에 당당히 조선의 창업주 태조의 정비로 반열에 올랐다. 왕비의 릉은 재능으로 1408년(태종 8년)에 크게 공사하여 왕릉의 모습을 갖추었다. 신의왕후 한 씨의 릉은 휴전선 넘어 개성시 판문군 상도리에 있다. 태조의 릉인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과 40Km 이상 더 떨어져 있어 릉에서 직접적으로 제사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4. 한편, 태조의 경처인 신덕왕후 강 씨는 누구인가?
태조 이성계와의 만남과 영광, 왕비의 사후, 태조 이성계가 조성해준 정릉과 흥천사는 이성계가 신덕왕후 강 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세자 책봉에 원한을 품은 방원과의 관계로 왕후의 릉이 천장 당하는 실로 말 못 할 고통을 당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신덕왕후의 신위는 사후(死後) 무려 273년, 1669년(현종 10년)에 종묘에 부묘되어 조선의 왕비로 신원되기까지 그녀의 삶은 우리들에게 버들잎 스토리와 세원 지우(洗寃之雨)로 회자되어 안타까운 전설로 전해오고 있다.
5. 태조는 신덕왕후 강 씨를 통해서 2남 1녀를 두었다.
7남, 무안대군(방번) 8남 의안대군(방석이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소생 막내아들 방석을 후계자로 삼고 1392년 8월 개국 한 달만에 방석을 세자로 책봉 헸다. 막내아들이 조선의 세자로 책봉되는 영광의 뒤안길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스토리가 조선의 역사 속에 내내 이어져 갔다. 1396년 신덕왕후가 병으로 죽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다. 그 비극을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대략 이러하다
▶ 신덕왕후의 두 아들은 1차 왕자의 난(이방원의 난)으로 모두 죽임을 당한다.
▶ 한양 도성 내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릉은 도성 밖 지금의 성북구 정릉으로 천장 되었다.
▶ 제사는 폐지되었고
▶ 왕비에서 후궁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당했다.
▶ 가족은 성한 곳이 한 곳도 없이 수백 년 동안 혼백이 구천을 떠다녀야 했다.
6. 그 후 유교문화가 정착되고 문화가 꽃피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으로 가혹하게 홀대받았던 개국 초기에 인사 문제들을 검토하면서 그 과정에서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하여 왕비로 복원시키고 신주는 종묘에 배향되어 태조를 모신 신실에 부묘되었다. 바로 그날 성북구 정릉에는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 내린 비가 내렸다 한다. 사람들은 이 비를 세원 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태조와 신덕왕후 강 씨의 넋(魄)은 죽어서도 함께하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태조와 두 왕비의 신주가 나란히 종묘에 모셔져 있어 조선왕조의 창업 군주의 위상을 놉히고 제향을 받고 있어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