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랑공파 시조공(始祖公) 사우(祠宇) 경절사(擎節祠)
하늘에서 본 경절사 항공사진
경절사(擎節祠)는 시랑공파 시조공(始祖公) 고려충절신(高麗忠節臣) 하공진公(河拱辰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날아갈 듯 날렵한 자태의 촉석루를 내려다보며 북장대를 뒤로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시조 사우(祠宇) 경절사는 비단 우리 진양하성(晉陽河姓)의 성역일 뿐만 아니라 고장의 명소로서 구국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경절사의 구조는, 외 삼문(外三門)을 들어서면 각종 행사 시 회의 장소로 사용되는 충의당(忠義堂)이 있고, 우측에는 행사나 제향 때 종원들이 기거하는 수덕재(修德齋)가 있다. 그리고 상단 내 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3칸 규모의 맞배지붕을 올린 경절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내부 정면에 시조공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우 동편의 3칸 건물은 전사청(典祠廳)이다.
대종회에서 발간한「충의당 연혁」(河元稙, 2003)에 의하면 경절사 역사는 1804년(순조 4년)에 수곡면 사곡리 낙수암에 창건하여 시조공의 위패를 봉안하고 음력 12월 15일에 사림봉사(士林奉祀)함으로써 시작된다. 고려시대에 시조공의 태지(胎地)인 공북리(진주성지 내)에 향사(享祠) 공북당(拱北堂)이 내려져 조선시대까지 제향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숙종조 김진재의 병풍화<진주성도>에 공북당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묘사되어있다. 낙수암 경절사는 1868년(고종 5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향사(享祀)를 일시 중지하였다가 이듬해에 부조묘(不 祧 廟) 나라에 공훈을 세운 것을 기리어 신주를 영원히 모시도록 하는 不 祧 之典으로 건립한 사당)로 자손봉사하였다. 1954년에 종회(회장 河泳珍)에서 시조공의 사우(祠宇) 건축 기성회를 결성하고 기금을 조성하여 부지를 매입하였는데, 남성동 진주성지 내 북장대 아래 167의 3번지 238평이었다. 이곳은 시조공께서 탄생하시고 성장한 곳으로 바로 공북리(拱北里)이다. 조선조에는 병영, 관아로, 일제강점시에는 도청부지로, 도청이 부산으로 이전된 후에는 관사부지로 수용당하였던 곳이다. 1958년 4월 8일, 드디어 경충사와 충의당이 준공되어 시조공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향일을 음력 3월 17일로 하였다.
1978년 경충사는 한차례 고난을 치르게 되는데, 정부에서 진주성을 임진란 전적지로 성역화하기 위하여 성내에 있는 모든 민가와 구조물에 대하여 철거령을 내린 것이다. 종회에서는 '충의당 사적보존회(회장 河炳台)'를 결성하고 철거 유보를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당시 경직된 사회에서 대통령이 재가하고 문공부 장관이 발령한 철거령을 철회시키기는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종회에서는 10여 종의 참고자료를 첨부한 장문의 '충의당 사적지 보존 건의서'를 작성하여 행정당국에 보내는 한편, 학계와 정계의 유력인사와 활발한 접촉을 벌였다. 특히 보존회장 河炳台는 수십차례 상경해서 당시 최고위층과 가까운 사이였던 노산 이은상(시조작가, 예술원 종신회원)과 접촉, 진주성지를 직접 방문케 하여 경충사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하게 함으로써 사태 반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9년 5월 18일, 문화재전 문위원회 결의를 거쳐 청와대의 승인을 받아 충의당 경충사는 유지 보존한다라는 문공부 방침이 확정되었다. 종회에서는 내친김에 사우를 확장중건하기로 하고 종원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는 한편, 진주시와 문화재관리국 등 관계기관을 수차례 방문교섭하여 승인을 받아냈다. 공사는 진주시가 주관하고 지금은 정부에서 전액 부담한다는 방침이 있었으나, 자금 조달 부진으로 지연되다가 1988년 6월에 정부가 고려충신당 보수비로 6천만원을 지원함으로써 이듬해 3월 공사가 착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건립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시에서는 경충사가 북장대를 가린다는 이유로 원위치에서 동편으로 20미터나 옮기고 시조공 사적비를 경내로 이건하려 했다. 종회에서는 다시 임시회의를 열고 새로이 시조공사적지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회장 河炳台)를 결성하여 경충사 원위치가 구국 충절신(救國忠節臣)이신 시조공의 태지이며 진양하성의 발상지임을 들어 시의 이건공사를 유보시켰다.
그리고 관계기관과의 힘든 교섭끝에 1989년 6월, 사우경역으로 남북 41.5미터, 동서 34미터, 430평의부지를 사용하라는 문공부 승인을 받아냈다.
철거의 위기에 처했던 경충사가 종원들의 기민한 대응과 합심 노력으로 확장 중건하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 할 만했다. 수덕재(修德齋)건립 등 확대된 사업비는 전액자손부담으로 하기로 함에 따라 헌금을 모금했는데, 헌금은 각지에서 답지하여 멀리 일본에서도 참여하였다. 1992년 공사가 완공되어 그 해 4월 낙수암 경절사에 봉안하던 시조공 위패를 이안(移安)하고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경충사 현판을 경절사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3월 17일(음)을 대제 봉향일, 12월 15일(음)을 기제 봉향일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절사는 우리 진양하성(晉陽河姓)의 성역일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기와 자주정신을 선양하는 도량이며 구국충절의 정신을 거양하는 표상으로 나라에서 영구히 현창하고 보존하는 문화재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진양하씨 시랑공파 대종회 종보 2호에서...
진주성내 시랑공(拱辰)을 모신 사우 경절사
진주성내 시랑공(拱辰)을 모신 경절사 사당
시랑공파 시조 시랑 하공진선생의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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