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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강해(퍼온글)

레토코리언스 2016. 1. 25. 06:34

論語 學而篇 1章



 

   子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자왈학이시습지   불역열호

    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子: 남자에 대한 美稱으로 姓 밑에 붙여서 쓰지만, <論語>에서는 孔子의 제자들이 공자의 말씀을 기록할 때 공자의 성을 생략하고 썼기 때문에 '子曰'로 시작되는 문장의 "子'는 모두 孔子를 가리킨다.

學 : 效也, 곧 본받는다는 뜻으로 선왕의 도를 본받음.詩·書·禮·樂을 배움.

時 : 때때로, 수시로.

之 : 동사로 쓰이면 '간다'는 뜻이 되고, 소유격 조사로 쓰이면 '~의'라는 뜻이 되지만, 타동사의 목적어로 쓰이면 대명사가 된다. 뜻은 '그것'인데,타동사의 목적어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고 막연하게 쓰일 때는 번역하지 않고 생략하는 것이 순조롭다. 이 문장에서는 習의 목적어로서 앞의 學, 즉 배운 내용을 가리킨다. 學도 타동사이므로 원래 이 문장은 '學之而時習之'로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이나 '之'가 두 개 있으므로 앞의 것이 생략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習 : 習자는 羽와 白(白은 自, 自는 원래 鼻의 뜻)이 합한 글자, 새끼 새가 어미새를 본받아 여러번 날면 숨결이 입과 코로 나오므로, 새끼 새가 나는 법을 익힌다는 뜻이다.그러므로 무조건 복습하는 뜻이 아니고, 새가 자주 날아 스스로 나는 법을 배워 익히듯 복습하여 익히는 것을 말한다.

不 : 非가 명사를 부정하는 역할을 하는 데 비하여 不은 동사나 형용사를 부정하는 역할을 한다.따라서 不 다음에 나오는 '說', '樂', '君子'는 모두 형용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不亦 : 또한 ∼ 하지 아니한가?

說(열) : 기뻐할 열(悅)과 같음.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

有 : 한 글자로 된  앞에 붙여 두 글자로 만듦으로써 음률을 부드럽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고 다른 뜻은 없다. 栗谷은 有를 다음에 오는 '自遠方來'의 술어로 보아 '벗이 邊方에서 옴이 있으면'으로 풀이 하였다.

自 : 부사로 쓰이면 '스스로'라는 뜻이지만,장소를 나타내는 말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말 앞에 놓이면 행위를 나타내는 말 앞에 놓이면 행위의 起點을 나타낸다. '~으로 부터', '~하는 것에서 부터' 등으로 번역하면 된다.

人 :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기'의 상대 개념으로 쓰일 때는 '남'이 라는 뜻이 된다.

君子 : '不'이 동사나 형용사를 부정하는 역할을 하므로 여기서의 君子형용사로 해석하여 '군자답다'로 번역해야 할 것이다.

온 : 성내다, 화내다. 원망하다.

學問은 一身의 榮達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누군가 알아주지않아도 세상을 원망하지않으니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 修學의 경지에 이른 君子인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제때에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도 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아니해도 화나지 아니하니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해설]


學이란 무엇이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聖人들은 인간이 참되게 살아가는 행동양식으로 禮를 가르치고 있으며. 禮를 배워서 실천하는 것이 學의 일차적인 목표가 된다.
그런데 禮는 구체적인 행동규범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스러운 행동을 속박하는 요소가 될 수 있고, 이 禮를 지키는 사람이나 지키지 않고 사는 사람이나 죽고 나면 다 같이 한 줌의 흙으로 변하므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 禮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실천력을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禮가 가지는 한계성을 극복하고, 실천력을 회복하는 방법은, 禮 자체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단순한 행위규범이 아니라 자장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한 결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행동양식임을 자각하고서,禮를 통하여 그 속에 내포된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인식하여 실천하는 데 있다. 그러면 禮를 일일이 배워서 실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의 삶을 영위한 결과 나타나는 모든 행동양식이 저절로 禮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사회에서 영위되는 인간의 삶은 인간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데, 모든 인간관계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 임금과 신하의 관계(이는 계급적인 모든 상하관계를 포함한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 형과 아우의 관계(이는 선배와 후배 등의 모든 비 계급적인 연령별 상하관계를 포함한다), 친구관계 등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이 찾아내어야 할 것이다. 孟子는 그것을,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는 親,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서는 義,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는 別,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서는 序, 친구관계에서는 信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가장 가치 있는 삶은 親. 義. 別. 序. 信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본래 모습인 ‘하나됨’의 상태를 유지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이를 ‘中庸’에서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리’라는 의미에서 ‘五達道’라 하였다. 따라서 禮는 이 다섯 가지의 道를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양식임을 알 수 있다. 道를 터득하여 실천하게 되면, 이제까지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요소로 여겨졌던 禮가 道를 실천하는 구체적 행동양식으로 그 본래의 의미를 되찾게 되고 禮가 갖는 한계는 저절로 해소된다. 이렇게 하여 孔子가 말하는 學의 대상은 禮에서 道로 발전한다. 道를 터득하는 것이 學의 2차적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인간존재의 본질은 무엇인가?
나는 나의 ‘몸’이 ‘나’인 것으로 착각하고 나의 ‘몸’이 죽는 것을 ‘내’가 죽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내 몸은 부모에게서 생겨난 조그만 물체가 물, 밥, 소기 등의 다른 물체를 받아들여 모아진 것이다. 원래 나의 것이 아니었던 물테들을 도로 돌려주고 나면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 따라서 현재의 나는 본래의 나를 잃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참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잃고 있는 본래의 ‘나’를 찾아야 하고, 본래의 나의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학문이란 잃어버린 ‘나’와 나의 삶을 되찾는 길이다.
나의 ‘몸’이 생겨나게 된 동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합에 의한 것인데, 그것은 두 분의 뜻이라기보다는, 양과 음이 서로 좋아하게끔 되어 있는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이고, 새로운 생명체가 호흡을 하고 심장이 뛰며 점점 자라게 되는 것도 ‘자연의 이치’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호흡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의 이치’에 의하여 호흡을 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자는 것이 아니라 자게 되는 것이며, 내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뜻대로 호흡하는 것이라면 호흡자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고, 자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며,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 그 자체는 기본적으로 내가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영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주체는, 단지 이 몸의 삶을 주도하고 있는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로 인식하면 내 ‘몸’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는 ‘자연의 이치’ 바로 그것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의 이치’는 내 ‘몸’의 삶을 영위시키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남의 ‘몸'의 삶을 영위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며 만물의 삶을 영위시키는 주체이기도 하며 만물의 삶을 영위시키는 주체이기도 하기 때문에, ‘자연의 이치’를 나의 참존재로 파악하면 나의 참존재가 너의 참존재이며 만물이 참존재가 된다. 참존재라는 차원에서 만물은 모두 하나가 되는 것이다.

道란?
객관화된 인간의 행동규범이 禮이고 그 禮의 성립근거가 道이므로 道는 일견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이 없으면 성립되지 아니하므로, 그 성립근거는 인간의 내면에서 연유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학문적 관심은 禮를 중심으로 한 외부세계의 행동규범과 그 예의 성립근거인 道에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道의 성립근거를 알기 위하여 인간의 내면세계로 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금까지의 학문을 윤리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학문은 형이상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자연의 이치’로는 태양이 비치도록 하고 사계절이 순환되도록 하는 등 만물 전체의 삶의 조건을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만물 하나 하나를 낳고 기르는 원동력이 있다.
儒學에서는 자연의 이치가 갖는 두 가지 측면으로 전자인 天命을 실현하는 것이며, 후자인 性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道를 따라서 사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에게 원래 性을 실현하는 능력이 있었음을 감안하여 [大學]에서는 이것을 “明明德”(과거에 밝았던 德을 다시 밝히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道를 닦아서 실천한다는 학문의 목적은 德을 다시 밝히는 것이다.

德을 밝히는 방법?
德을 밝히는 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나누어 먹으려는 마음을 굳세게 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혼자만 먹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고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전자에 해당하는 것이 誠意이고 후자에 해당하는 것이 持敬이다. 誠이란 단절되고 왜곡됨이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말하며, 意란 性의 발동을 말한다. 性은 마음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인데 이 性이 발동하여 구체화된 마음이 情이다. 그러므로 意는 性에서 발동은 했으나 情으로 가는 과정에 있는 마음을 말한다. 따라서 誠意는 性이 발동되어 情으로 가는 과정에 있을 때 단절되거나 왜곡됨이 없이 곧바로 이어 지도록 한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持敬이란 생각하고 헤아리고 계산하는 등의 마음의 기능을 중단시키고 경건성을 유지 하는 것이다. 性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나의 性은 내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주관적인 것이므로 쉽게 인식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남의 몸에 내재해 있는 性을 객관화시켜서 관찰하여 인식한 후 그것을 미루어서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것이 格物이고 致知이다. 格物은 다른 것으로 나아간다는 뜻이고, 致知는 앎을 이룬다는 뜻이니 格物의 결과 다른 것에 내재해 있는 性을 인식하고 그것을 통하여 나의 性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내 몸에 내제해 있는 性과 동일하며 만물에 내재해 있는 성 바로 그것이므로 그것을 天命이라고 한다. 따라서 性을 인식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학문의 목적은 결국 天命을 인식하는 것으로 심화된다. 天命을 인식하고 天命을 실천하는 지점에서 학문의 목적이 달성되고 학문은 완성된다. 天命을 인식하고 실천하게 되면 天命이 내 몸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가 되고 나의 몸은 天命을 실천하는 도구가 된다. 따라서 天命은 내 몸의 삶을 영위하는 주체인 ‘나’가 된다. 天命은 만물 전체의 삶을 영위해가는 주체이므로, 天命은 모두를 살려가기 위하여 늙고 병든 몸을 죽게 만든다. 죽지 않았다면 모두가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몸이 늙어서 죽게 되는 것은 天命,즉 ‘하늘의 뜻’이며 바꾸어 말하면 나의 희망으로, 그것은 기쁜 것이다. 나의 죽음도 기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기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학문은 기쁨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므로 학문하는 과정 또한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참조:성균관대학교 출판부 간행 李基東釋解 論語講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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